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 선고가 내려진 지 사흘이 지났다. 내란에 준하는 국기 문란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주역은 여전히 관저에 칩거한 채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우원식 국회의장은 돌연 개헌을 제안하고 나섰다. 국민 다수가 탄핵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바로 그 직후다. 이러한 시기에, 국회의장이 갑자기 개헌을 말한다는 건 정치적 시기상, 절차상 납득하기 어렵다. 내란의 잔당들이 여전히 잔존하는 상황에서, 국회의장은 정치적 흐름을 단절시키고 오히려 그들과의 권력 공유를 제안한 셈이다. 그의 임기가 고작 1년 남짓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선택은 주권자인 국민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로 읽힌다. 어떻게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세력과 권력을 나누자고 할 수 있는가? 국민은 스스로를 조직화하며 권력을 심판했는데, 그 직후 권력자들끼리 “제도를 나누자”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정의 없는 개헌 논의의 맥락
우 의장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자"며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다.
문제는 윤석열이라는 개인이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사유화한 데 있었다.
국민은 그 사유화를 심판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그 열망에 응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 개편이 아니라, 헌법 정신의 회복이다. 정의란 단순한 절차적 중립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와 도덕적 비전의 실현이다.
우 의장의 개헌 제안은 그 비전을 담고 있는가? 그 개헌은 왜 지금이어야 하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샌델은 정치란 도덕적 의미의 투쟁이라고 했다. 우 의장의 제안은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제도적 효율성의 문제로 희석시킨다. 이는 위험한 왜곡이며, 국민 투쟁의 의미를 구조의 결함으로 환원시키는 행위다.
공정과 효율의 언어로 포장된 엘리트주의
정의 없는 개헌 제안은 국민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우 의장의 담론에는 권력과 기득권만 존재한다. 탄핵이라는 투쟁의 주역인 국민은 그 담론에서 실종되었다.
정치 갈등 해소, 협치, 내각제, 권력분산 같은 단어들. 모두 샌델이 비판한 절차적 자유주의자들의 언어다. 형식은 공정해 보이지만, 내용은 공허하다. 누가, 어떤 도덕적 자격으로 권력을 나눌 것인가?
시민의 삶을 저버리고 권력 게임에 몰두해 온 정치세력들이 서로 권력을 나누는 것이 국민주권이 되는가? 샌델이 말한 ‘공정하다는 착각’처럼, 이러한 담론은 공정과 효율이라는 포장으로 기득권의 자기보호를 정당화할 뿐이다.
제도 개혁보다 먼저 나왔어야 할 것 : 반성과 책임
국회는 지금 성찰을 먼저 내놨어야 했다. 누가 대통령을 그 자리에 오르게 했는가? 누가 헌정 질서 파괴를 방조하고 묵인했는가? 그 과정에서 국회의 책임은 없었는가?
그러나 우 의장은 자신과 국회의 책임은 회피한 채 이제 와서 “권력을 나누자”라고 한다.
이것은 정의 없는 기술정치이며, 도덕적 성찰 없는 제도 개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헌이 아니라, 주권의 실질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헌법 개정이 아니다. 국민이 간신히 되찾은 주권의 실질적 구현이다.
샌델은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가 아니라 공적 삶의 덕목이라고 했다. 시민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적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지금 대한민국 시민들은 바로 그 공적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
탄핵이라는 역사적 순간은 단지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어떤 통치가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장이 해야 할 일은, 권력 나눠먹기용 개헌의 수사적 설계가 아니라 그 시민적 물음에 정면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헌법을 원하는가? 그 헌법은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하는가? 정치는 기술이 아니다. 정치는 책임과 기억의 예술이다.
정의는 지금, 국민이 묻고 있다.
“정말 이게 다였느냐?”
그리고 그 물음에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정치에게 국민은 다시 묻고, 다시 응답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헌법의 주인은 언제나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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